서론: 혼란과 도전의 고려 말, 내부 외부 이중의 위기
14세기 중·후반, 고려는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국내에는 원 간섭의 폐해와 권문세족의 전횡, 개혁 시도의 진통이 있었고, 외부로는 북쪽에서 홍건적(紅巾賊), 남쪽에서는 왜구(倭寇)가 연이어 침입하여 국토와 민생,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었습니다.
홍건적은 중국 한족 농민 반란군이자 원 말 혼란기의 잔당 세력으로, 2차례 침공 끝에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으며, 왜구는 일본 쓰시마 등을 거점으로 삼아 해안은 물론 조운선(곡식 운반선)과 내륙심지까지 유린했습니다.
이중 위기 속에서 고려는 어떻게 대응했고, 결과적으로 어떤 교훈과 변화를 남겼는지 오늘날의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1. 홍건적 침공의 배경과 경과
홍건적은 원나라 말기 절대적인 사회 혼란 속에서 등장한 중국 한족계 농민 봉기군입니다. 원의 탄압으로 요동(만주) 일대로 밀려난 이들은, 1359년과 1361년 2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 1차 침입(1359년, 공민왕 8년):
- 모거경이 이끄는 홍건적 군 4만여 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정주 등 북부 주요 지역을 유린하고 서경(평양)을 점령했습니다.
- 고려 장수 안우‧김득배‧이방실 등이 반격해 이듬해 겨우 서경을 탈환.
- 퇴각 도중 홍건적은 대패하여 몇 백 명만 살아 돌아가는 궤멸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 2차 침입(1361년, 공민왕 10년):
- 반성, 사류, 관선생 등 지휘 하 20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압록강을 넘어 개경까지 진출, 수도를 함락.
-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란, 고려 조정은 사분오열 상태가 됨.
- 장군 최영, 이성계, 정세운 등 신흥 무장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개경 탈환(1362년 1월), 홍건적은 10만 명 전사, 나머지도 패주.
홍건적의 침입은 단순 침공이 아니라, 국가 행정의 마비, 농촌·도시의 유린, 왕권의 일시적 와해, 그리고 신흥 무인세력의 성장(이성계 등)을 촉진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2. 왜구 창궐의 실상과 피해
왜구
는 이미 13세기부터 산발적으로 고려 연안을 습격해 왔으나, 본격적 위기는 1350년 이후부터였습니다.
- 주요 특징:
- 쓰시마 등 일본 서부 해안과 소도서(島嶼)를 근거지로 삼아, 충청‧경상‧전라‧황해도 해안은 물론 내륙까지 침입.
- 곡식 수송로(조운선), 창고(조창), 백성 곡식·재화 약탈 및 방화·살인까지 자행.
- 1370~1380년대에는 연간 수십~수백 회에 걸쳐 대규모 약탈 진행, 우왕 연간 14년 동안 378회 침입 기록.
- 피해의 양상:
- 해안지역뿐만 아니라 강화도, 개경 입구까지 공격받음.
- 세곡 조달 어려움, 국가 재정 악화, 피폐해진 지방경제와 민심 이반 촉진.
- 내륙까지 왜구가 침입해 종종 국가적 천도 논의까지 등장.
3. 고려의 이중 위기 대응전략과 변화
홍건적·왜구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다각적 위기 대응역량의 총체적 시험장이었습니다.
- 군사적 대응과 신진 무인 성장
- 홍건적 격퇴 및 왜구 토벌전의 최일선에는 최영, 이성계, 이방실, 안우 등 신흥 무장세력과 관군·지방 편제군이 적극 투입됨.
- 이 과정에서 이성계 등 장군들의 부상은 조선 건국 세력으로의 전환점이 되었음.
- 기술 혁신과 무기 개발
- 최무선의 화약 무기·화포(화포, 화살, 비격진천뢰 등) 개발, 수전(火戰)을 통한 왜구 토벌.
- 박위의 쓰시마 원정(1389) 등 해상 침공을 통한 근원지 격파 시도.
- 정치·행정 혁신의 계기
- 이중 위기는 개혁정책의 동력 약화와 권문세족의 한계, 왕권 약화 등 부정적 영향도 가져왔으나,
- 신진 관료 및 무장세력이 성장(신흥 무인 영향력 확대)함으로써, 고려 체제를 넘어 조선왕조의 토대 마련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의.
- 민간·지방 방어와 공동체 강화
- 지방 호족, 농민, 관노 등이 왜구와 홍건적 격퇴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체 의식과 지역사회의 자생적 방어의식 고양.
결론: 홍건적·왜구, 국가 위기와 체제 변화의 주역
14세기 고려 말기 홍건적과 왜구의 이중 침공은 조정 체제와 왕권, 민생까지 위협한 국가적 재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극단적 위기 속에서 신진 무인 세력의 성장과 군사혁신, 민중·지방 주체 의식 강화, 그리고 체제 개편의 요구가 폭발하며, 조선 개국이라는 새로운 시대 전환을 이끌었습니다.
국가 존립과 자주성 회복을 위한 굳건한 대응, 기술·제도 혁신, 지방과 중앙의 협력 등은 고려의 마지막 ‘자주국가적 저항력’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홍건적·왜구 대응의 성패는 이후 한반도가 다시 마주한 외침(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에서 어떤 교훈을 삼아야 하는지, 끊임없는 ‘국방·민생·개혁’의 상호 연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할 소중한 역사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