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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이 정말 사대주의자인가―묘청과의 대립 재조명

딥밸류 2025. 7. 2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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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자주와 사대, 한국사 최대 논쟁의 중심

김부식은 고려 중기 개경 문벌귀족 세력의 대표자이자, 『삼국사기』라는 방대한 역사서를 남긴 인물입니다. 특히 1135년 ‘묘청의 난’ 진압과정에서 보여준 태도, 그리고 역사 편찬 방식 때문에 그는 오랜 세월 ‘사대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왔습니다.

반면 단재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는 묘청의 서경천도·독자적 연호‧금국정벌 주장(자주론)과, 김부식의 실리·화친적 정책 대립을 단순 ‘자주 대 사대’ 싸움으로 규정, 후대에 거대한 평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과연 김부식은 정말 사대주의자였는지, 묘청과의 대립을 통해 오늘날 다시 살펴봅니다.

김부식이 정말 사대주의자인가―묘청과의 대립 재조명

1. 김부식, 문벌귀족과 ‘실리 유학자’의 실체

  • 김부식은 고려 인종대 최고 권력자이자 유교적 합리주의자였습니다.
  • 송나라 사신 파견 등 화친외교 경험이 풍부했고, 국제 정세를 예리하게 파악해 '강대국과 정면 충돌보다는 실리를 챙기는 외교'를 중시했습니다.
  • 그의 『삼국사기』는 중국 사서의 기술체계를 일부 따르면서도, 을지문덕·연개소문 등 고구려 인물의 활약도 공정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 반면 중국 중심의 기록방식, 발해사 누락 등 한계로 인해 ‘사대주의’ 프레임이 고착되었습니다.

2. 묘청과의 대립: ‘민족주의 vs. 사대주의’ 프레임의 해석

  • 묘청은 서경(평양) 천도, 칭제건원, 금나라 정벌론을 주장하며 강한 자주·개혁 노선을 취했습니다.
  • 김부식은 실질적 국력과 국제 정세, 왕권 중심의 현실을 반영해 급격한 독자노선과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 당시 송·금의 변화, 여진족 성장 등 동북아 정세에서 국제 확전을 당장 추진하기엔 국내 기반과 국력이 취약한 상황이었습니다.

3. ‘사대주의자’ 비판의 기원과 확대

  •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 실패로 사대주의가 고려-조선 천 년 역사를 지배했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 이후 ‘묘청=자주/진취, 김부식=사대/보수’의 뚜렷한 대립 도식이 널리 퍼집니다.
  • 하지만 실제로는 유교적 왕도정치, 문벌귀족 체제, 외교적 실리 중시 등 김부식의 선택 또한 ‘국정 안정과 민중 보호’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 김부식의 현실주의는 당대 문벌귀족 체제의 기득권 유지 목적도 있었으나, 자주론이 가져올 지도부 분열‧외침 리스크도 염두에 둔 결과였습니다.

4. 김부식의 역사관―실리와 계승, 국익의 우선인가?

  • 『삼국사기』가 고구려, 백제의 대중국 저항을 ‘멸망 원인’으로 기술한 부분은 사대적 해석의 대표 근거지만, 당시 국가 생존의 실리 추구와 통합 의식 강화 목적도 있었습니다.
  • 반면 고구려 북방 경영, 백제 대외교류, 신라의 강역 확장 등 진취적 서술도 함께 존재합니다.
  • 오늘날에는 김부식의 선택과 『삼국사기』 편찬 의도가 단순히 ‘사대’가 아니라, 사회 안정과 왕권 강화를 통한 국가 존속, 그리고 후대 역사 인식의 ‘교정 효과’ 측면도 있었다는 재평가가 나옵니다.

5. 묘청의 난과 이후 고려사에 미친 영향

  • 묘청의 난 실패 후, 고려사회는 문벌귀족 중심의 보수체제로 굳어졌고, 이는 필연적으로 구조적 모순(무신천대 등)을 낳아 후일 무신정변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 김부식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고려는 한동안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으나, 자주적 기상과 개혁 동력은 약화되고 문신사회에 경직성이 강화되는 결과도 있었습니다.

결론: 김부식, 사대주의자로 단정할 수 있는가?

김부식과 묘청의 대립을 ‘자주/사대’ 이분법으로만 보는 평가는 역사적 맥락을 단순화한 결과입니다.
김부식의 선택에는 당시 국제정세와 국가 생존, 사회 안정 등 복합적 요소가 작동했고, 실제로 왕권 강화 및 국가 존속이라는 현실적 성과도 있었습니다.
‘사대주의자 김부식’이라는 프레임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적 이념과 현대적 관점이 과도하게 입혀진 이미지로, 오늘날에는 좀 더 입체적이고 맥락적인 평가가 필요합니다.

『삼국사기』와 고려 중기의 역사적 선택, 문벌귀족 사회의 보수화와 개혁 동력 사이에서 김부식은 한 시대 현실주의자의 얼굴과 유학 지식인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묘청의 자주노선과의 대립을 통해 역사의 ‘결정적 전환기’였던만큼, 사대/자주의 프레임을 넘어서 ‘국가 생존, 역사 인식, 사회 변동’의 다원적 관점에서 다시 비평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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