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발해는 종종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소개되지만, 그 명확한 정체성과 대외 인식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발해가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서 **스스로를 ‘고구려 계승국’이라 명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 사서인 《속일본기(續日本紀)》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발해의 자칭 정체성, 외교 전략, 그리고 오늘날 역사적 의미를 조명해보겠습니다.
발해의 건국과 정체성의 딜레마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동모산 지역에서 세운 국가입니다. 고구려 멸망(668년) 이후, 당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왕국을 수립한 발해는 초기부터 고구려와의 연결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측 역사서에서는 발해를 당의 지방 정권처럼 기술하거나, 거란·말갈계로 묘사하며 의도적으로 고구려와의 연결성을 희석시키려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발해 스스로는 어떤 정체성을 자처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사료가 바로 **일본 외교 문서**입니다.
《속일본기》에 기록된 발해의 외교 서한
《속일본기》는 일본 나라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로, 일본과 교류했던 주변국들과의 외교문서를 상세히 남기고 있습니다. 8세기 발해는 여러 차례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이 과정에서 외교 문서 속에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고구려의 유민 대조영이 왕이 되어 발해국을 세웠으며, 고구려의 풍속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속일본기》, 727년 기록)
이는 발해가 일본에 자신을 단순한 신생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합법적 후계자로서 인식시켰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왜 일본에 ‘고구려 계승’을 강조했을까?
발해가 외교 문서에서 고구려 계승을 강조한 이유는 정치적 정통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됩니다. 당시 일본은 백제·신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고, 발해는 자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고구려라는 강대국의 후예임을 부각시켰습니다.
- 정치적 목적: 고구려는 일본과 오랜 외교 관계를 맺은 강국이었고, 그 후예임을 내세움으로써 대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 문화적 정체성: 발해는 고구려의 관복, 제도, 지명 등을 다수 계승했으며, 이를 일본에 설명함으로써 독자적인 문명국으로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발해와 일본의 외교: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다
발해는 8세기에서 9세기 사이 일본에 총 30여 차례 사신을 파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조공 외교가 아닌, 문화·경제 교류의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분석됩니다. 일본 측도 발해를 ‘대국’으로 인식하며, 신라보다 더 고등한 문명을 가진 나라로 기술한 사례도 있습니다.
특히 일본은 발해의 도자기, 책, 불교 유물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러한 문화 교류를 통해 발해는 동북아시아의 선진 문명국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이때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임을 강조한 것은 문화적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정당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사 교육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과서나 일반 대중 역사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자주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사료의 부족: 일본 사료에 의존해야 하므로 국내 사료 중심의 서술에서 누락되기 쉽습니다.
- 남북 분단의 영향: 발해 유적 대부분이 북한과 중국에 분포되어 있어 연구가 제한적입니다.
- 고구려 중심사관의 그늘: 발해 자체보다는 고구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큽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발해의 독립성과 고구려 계승 인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 외교 문서의 의미는 더욱 주목받고 있습니다.
결론: 외교 문서로 확인된 발해의 역사적 자의식
발해는 단순한 고구려 유민 국가가 아닌, **스스로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선언한 독립 국가**였습니다. 일본 외교 문서를 통해 우리는 발해가 단지 생존을 위한 외교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역사적 자의식과 국가 정체성을 강하게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발해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이며, 한국사에서 발해의 위상과 고구려와의 연결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줍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 정신을 계승한 또 하나의 당당한 나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