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외세 침탈 속 마지막 불꽃, 삼별초 항쟁의 새로운 평가
13세기 후반, 고려는 몽골(원)의 잇단 침공으로 국가주권과 존립마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몽골과 수차례 강화와 항전을 반복하다 1259년왕족 항복, 1270년 개경환도를 결정하면서 고려는 사실상 원에 예속됐습니다. 이 때 ‘무신정권의 친위부대’에서 출발한 삼별초가 국가적 저항의 기치를 들고 일어섭니다.
삼별초는 ‘강화~진도~제주’로 이동하며 3년간 국가 존엄과 민족 자주의 마지막 불씨를 지켰습니다. 그 항쟁의 실제 모습과, 오늘날 남은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삼별초의 탄생과 조직 특성
삼별초는 원래 고려 무신정권(특히 최씨 정권)의 사병 친위대로, 야별초(夜別抄)로 출발해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몽골포로 출신) 등으로 체계화된 특수군입니다.
삼별초의 핵심은 ‘군사력’뿐 아니라 무신집단과 일체화된 군정 수행, 해상무역과 경비, 치안 유지에 능통한 전문 무장조직이었다는 점입니다.
무신정권 몰락과 원종의 친몽 정책 아래, 삼별초는 해산령을 거부하고 “항복은 곧 국가멸망”이라는 신념 아래 자체적으로 봉기를 선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삼별초는 단순 무력항쟁 집단을 넘어, ‘임시정부’ 형태로 별도의 왕(승화후 온)을 옹립하고, 관제와 치안, 군정을 운영한 독립 집정기구로 그 위상이 확대됐습니다.
2. 강화도의 결기와 이동 정부의 탄생
1270년 5월, 원종이 원(몽골)에 항복 및 개경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강력히 반발하며 강화성을 봉기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1,000여 척의 배에 가족과 백성, 무기, 식량을 싣고 남하하는 과정에서 1,500여 명 군사에 달하는 ‘이동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삼별초가 강화도에 남겨둔 배와 인력, 성곽 방비력은 당시 조선 내에서도 최상위 수준이었습니다.
이 무렵 삼별초의 지도자인 배중손 등은, 왕족 승화후 온을 즉위시켜 영향력과 정통성을 확보함으로써 ‘정치적 저항’과 ‘제도 개혁’의 의지를 모두 담았습니다. 삼별초군은 강화 해안 및 내륙을 조밀하게 방비하는 한편, 주변 농민 봉기와 연계해 막강한 지지 기반을 확보했습니다.
3. 진도에서 해상 왕국을 꿈꾸다
1270년 말 삼별초군은 강화도의 위협을 피해 남하, 진도에 새로운 왕성을 펼쳤습니다. 여기서 삼별초는
- 용장사를 궁성으로 삼고 내·외성을 수축
- 중앙정부(중서문하성), 군사기구(삼군부), 내치기구 등 비상왕정 정비
- 도서 및 연안·내륙 통제력 강화, 지역 유민 및 노비 해방, 반몽·반원(反元) 정신 강조
진도 정부는 곡물·어업·해상 교역 등 경제자립에 힘썼고, 백성에게 실질적 자립과 방위를 독려하는 ‘자주 민생국가’의 면모를 보여 또 다른 ‘항몽 민주공동체’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진도와 영남, 호남 각지에서는 삼별초군의 영향력 아래 관노, 농민, 지역민 등 다양한 세력이 적극 동조하거나 순환 교전을 벌였습니다. 삼별초의 해상 전력은 전라도~부산~경주의 연안 해역까지 확대됐고, 제주·거제·김해 등 남해 일원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4. 진도 함락과 제주 최후 항쟁
1271년 5월, 몽골-고려 연합군(수만 명)이 대대적으로 진도에 상륙, 내·외성 포위, 집중 총공세를 감행합니다. 삼별초는 결사 항전을 벌이고, 지도자 배중손을 포함해 수천 명이 전사하며 진도정부는 9개월 만에 붕괴하지만, 잔존 병력은 다시 해상으로 빠지며 ‘저항 불씨’를 계승했습니다.
김통정 지휘 하에 남은 삼별초군은 제주도로 이동, 항파두리성 등을 중심으로 해상 방어망을 복구하고, 2년여간 해상 접점에서 다시 몽골-고려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삼별초군은 제주 각지의 촌락망, 산성, 해안 관문망을 이용해 유격전을 펼쳤고, 최후의 항전까지 끈질긴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1273년 4월, 몽골군의 총공세와 강압 앞에 제주도 항파두리성이 함락되며 삼별초 항쟁은 막을 내립니다. 김통정과 남은 장병들은 최후의 100여 명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전사하거나 생포되고, 삼별초의 항몽 저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5. 삼별초 항쟁의 사회적 의미, 민중의식, 유산
삼별초 항쟁은 세 가지 측면에서 큰 역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 민중의 자주·저항정신: 삼별초는 귀족-무신세력 뿐 아니라 노비, 농민, 관노, 해상 민중 등 폭넓은 참여와 연대를 이끌었습니다. 이는 고려사회가 국가 위기 시 민중 단위의 저항과 사회 변혁 가능성을 내포한 첫 ‘민중정권(Proto-Democracy)’ 실험이었습니다.
- 해상 네트워크, 지역연합의 모델: 삼별초의 남하, 진도~제주 해상 항쟁은 남해안과 서남해, 제주까지 ‘평면적 국가형 통합·방어’의 시범장이었습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해양 연합의 역사적 뿌리이기도 합니다.
- 항몽 저항 유산의 계승: 삼별초 항쟁은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500년 후 임진왜란·병자호란·근대 의병운동 등 독립의식이 이어지며, 한국사의 자주·의병 정신의 원류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습니다.
삼별초 항쟁은 한편으로 전국적 피해, 강경 노선의 한계, 국내 왕조 체제 내 분열과 갈등 등 부정적 측면 역시 남겼습니다. 그러나 ‘독립국가의 끈질긴 존엄과 백성의 민주적 참여의식’에서 오늘까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결론: 삼별초, 패배에서 태어난 자주의 뿌리
삼별초는 단순히 무장집단을 넘어 이동정부, 해상 네트워크, 민중 항쟁의 선각자적 성격을 모두 지녔습니다. 그 최후 항쟁의 길은 비록 패했으나, 조선 후기 의병, 일제강점기 독립투쟁, 그리고 오늘날의 국민 국가 의식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별초가 남긴 ‘독립·저항·자치’의 핵심가치는 국가의 명맥을 잇고, 공동체의 뿌리로서 향후 세대가 계승‧해석해야 할 귀중한 역사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