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七支刀)는 고대 한일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유물로, 특히 그 명문(刻文)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 간에 오랜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칠지도의 출처와 명문 내용, 그리고 해석에 따른 역사적 쟁점과 현황을 중심으로 자세히 설명합니다.
1. 칠지도란 무엇인가?
칠지도는 양날을 가진 칼로, 중앙 날과 양옆에 각각 3개의 가시 같은 날이 나 있어 총 7개의 날이 있음에 따라 붙은 이름입니다. 칼 표면에는 금박으로 60여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으며, 뛰어난 백제 당시 금속 공예술과 명문 기록이 결합된 고귀한 의례용 무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 중입니다.
2. 칠지도 명문의 내용과 제작 시기
명문은 앞면과 뒷면에 나뉘어 있는데, 앞면에는
“태화(泰和) 4년 ○월 16일 병오일, 백 번 단련한 강철 칠지도를 만들었다. 전쟁에 나가 많은 병사를 물리칠 수 있으므로 마땅히 후왕(侯王)에게 준다.”(예상 해석)
뒷면에는
“선대 이후로 이런 칼은 없었다. 백제 왕세자가 왜왕(倭王)에게 명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해 알리라.”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제작 연도인 ‘태화 4년’이 동진의 연호인 369년이라는 견해가 일본과 한국 일부에서 통용되며, 백제 근초고왕 시기와 일치합니다. 다만, 다른 견해로는 백제 자체의 독자 연호였을 가능성이나 북위 연호임을 주장하기도 하는 등 생산 시기에 대한 진위 논란이 관건입니다2.
3. 해석 논쟁: 백제가 왜에게 ‘하사’했나?
3-1. 일본 측 해석
일본 역사학계와 일부 문헌에서는 이 칠지도가 ‘왜왕’ 즉 당시 일본 야마토 정권의 왕에게 백제가 선물로 ‘하사했다’고 보며, 이를 일본 고대 국가권력의 위상을 상징하는 흔적로 해석합니다. 『일본서기』 등에는 ‘백제가 왜왕에 칠지도와 여러 보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근거로 제시하죠.
3-2. 한국 측 해석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명문의 ‘후왕(侯王)’과 ‘왜왕(倭王)’을 연결하여, ‘후왕’은 중간 단계의 제후국 군주를 의미하므로 백제는 왜를 직접적인 ‘속국’으로 보지 않으며, 이 칼은 ‘후왕’인 왜왕에게 준 ‘의례적 상징물’ 혹은 조공 형태로 풀이됩니다. 백제는 당시 한반도와 주변 해상 교역로를 장악한 강대국으로 일본에 ‘복속’ 또는 ‘조공’ 했다는 해석을 부정합니다.
4. 역사적 배경과 근초고왕기의 정치적 상황
369년 즈음은 백제 근초고왕이 군사적 힘을 과시하여 고구려와 대립하며 평양성까지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인 시기입니다. 백제의 국력은 절정에 달했으며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 깃발’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따라서 백제가 왜에 종속된 일개 후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한다는 점은 한국 학자들에게는 역사적 맥락상 자연스럽지 않은 해석입니다. 오히려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백제와 왜가 각기 독립된 군주국이었고, 때로는 상호 외교 관례에 맞는 조공 관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5. 칠지도 논쟁의 의미와 현대적 가치
칠지도는 단지 고대 무기가 아니라, 당대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추 역할을 하는 역사문화재입니다. 명문의 해석을 둘러싼 한일 양국 학계의 견해차는 고대 동아시아의 복잡한 국제 관계와 정치적 역학을 보여줍니다.
또한 칠지도는 백제와 왜가 상호 교류하며 문화와 기술을 주고받았음을 상징하며, 오늘날 한일 양국의 고대 역사를 재조명하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6. 결론: 칠지도와 한일 고대사 해석의 조망
칠지도 명문은
- 4세기 백제 근초고왕기 제작이 유력하며
- ‘후왕=왜왕’에게 ‘의례적’ 또는 ‘정치적 의도’로 하사된 것으로 보이나,
- 백제의 우월적 지위와 왜의 독립성 사이에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일본 측은 임나일본부설과 연계해 왜의 위상을 부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한국 측은 상호 교류 및 외교 관계 위주로 해석하며 강한 역사 논쟁을 낳았습니다.
칠지도는 고대 한일 관계 연구에서 서로 다른 역사인식과 해석 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입니다. 앞으로도 과학적 연구와 국제적 협력을 통해 그 제작 배경과 교류 형성에 대한 이해가 심화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