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79년 만에 항공기 고도제한 기준을 전면 개정한다는 소식이 수도권 부동산 시장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개정안은 1958년 김포공항 개장 이래 지속되어온 획일적이고 엄격한 고도제한 규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내용으로, 특히 서울 양천구와 강서구를 비롯한 김포공항 인근 지역의 도시개발과 재산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70여 년간 이어진 강력한 고도제한의 실상
김포공항 주변 지역은 1958년 공항 개장 이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수준의 고도제한을 받아왔다. 현행 규제에 따르면 공항 활주로 반경 4km 내 모든 건축물은 해발 57m를 초과할 수 없으며, 4km에서 5km 구간에서는 100m 이상 건물 건축이 금지되어 있다. 이러한 규제는 너무나 엄격해서 기준 높이보다 단 60cm 높게 지어진 건물도 강제로 철거하는 사례까지 발생했을 정도였다.
강서구 지역 주민들은 70년 가까이 이런 규제로 인해 재개발과 재건축의 기회를 박탈당해왔다. "천년 동안 재개발을 할 수 없다"는 자조적인 말이 나올 정도로 지역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양천구는 대부분 지역이 고도제한 대상에서 제외되어 목동 일대에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수 있었고, 하이페리온과 같은 265m 높이의 초고층 건물도 건설될 수 있었다.
ICAO 개정안이 가져올 근본적 변화
이번 ICAO 개정안의 핵심은 기존의 획일적인 원형 규제 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유연하고 현실적인 접근을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기준에서는 활주로와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규제가 적용되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계단식으로 고도제한을 완화하는 방식을 도입한다. 또한 기존의 수평표면과 진입표면 외에도 직진입 계기표면, 정밀 접근표면, 계기 출발표면 등 다양한 새로운 규제 표면을 신설하여 더욱 세분화된 규제를 적용하게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수평표면의 적용 범위가 기존 반경 4km에서 11km~13km까지 대폭 확대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고도제한과 무관했던 넓은 지역이 새롭게 규제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새로운 수평표면 지역에서는 건축물 고도가 최대 90m 이하로 제한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ICAO가 각국 정부에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고도제한 규정을 '권고' 형태로 제시하면서, 각국이 항공기 이착륙에 지장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 규제를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200m 높이의 건물도 허용할 수 있는 자율적 판단권을 준 것이다. 이는 항공학적 검토를 통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국토교통부에 제공한 셈이다.
지자체별로 엇갈리는 반응
양천구의 강력한 반발
양천구는 이번 개정안에 대해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가장 큰 우려는 목동 지역의 재건축 사업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목동에서는 49층 높이의 재건축을 계획하는 아파트 단지가 다수 있으며, 이들 단지는 대부분 150m에서 200m 높이의 건물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ICAO 개정안이 그대로 적용될 경우 90m 이하로 높이가 제한되어 사업성이 크게 저해될 수 있다.
양천구 관계자들은 "기존에 있었던 도시계획의 여러 규제를 완화하기는 커녕 오히려 강화하면서 우리 도시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특히 목동 지역에는 이미 265m 높이의 하이페리온 같은 초고층 건물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150m~200m 높이의 아파트를 새로운 고도제한으로 막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양천구는 서울시와 인근 자치구와 공동으로 대응하여 ICAO 개정안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막겠다는 입장이다. 국토교통부에 명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지형과 도시 밀도를 고려한 유연한 기준 적용을 요구하며, 수도권 지자체 간 공동 대응책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강서구의 기대감
반면 강서구는 이번 개정안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70년 가까이 강력한 고도제한으로 인해 재개발의 기회를 박탈당해온 강서구로서는 더 이상 현재보다 규제를 강화받을 이유가 없다고 보고 있다. 특히 실제 항공기 항로가 강서구 방향인 한강 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ICAO의 재량권 부여 조항을 통해 항공학적 검토를 거쳐 이 지역의 고도제한이 상당 부분 완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강서구 주민들 사이에서는 70년 만에 고도제한이 풀릴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물론 고도제한이 완화된다고 해서 즉시 재건축이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용도지역 등 다른 도시계획 규제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재산권 침해를 받아온 주민들로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기부채납 비율을 완화하는 등의 방식으로 사업성을 높여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직면한 어려운 선택
국토교통부는 현재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한편으로는 무안공항 사고 이후 항공 안전에 대한 사회적 민감도가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규제를 완화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보수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ICAO가 재량권을 부여함에 따라 특정 지역은 규제를 완화하고 다른 지역은 유지하거나 새로 부과할 경우 형평성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같은 규제 표면 안에 있으면서도 어떤 지역은 70층, 60층을 올릴 수 있고 다른 지역은 30층밖에 안 된다면 당연히 민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토부가 어떤 기준으로 규제를 적용할지에 대한 명확한 논리와 기준이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국토교통부가 ICAO의 권고를 기계적으로 적용하거나 최대한 보수적으로 적용해서 목동이나 신정동 등 다른 지역에 예상치 못한 새로운 규제가 생겨버릴 것이라는 걱정이 제기되고 있다. 국토부는 "공항 주변의 고도제한 개정은 안전을 확보하면서 적용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표명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방향은 밝히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앞으로의 전망과 과제
이번 ICAO 고도제한 기준 개정은 2024년 8월에 발효되며, 각국은 2030년 11월까지 자국 실정에 맞춰 적용해야 한다. 김포공항 인근 지역의 도시계획과 재건축·재개발 사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이번 변화는 향후 6년간 수도권 부동산 시장의 새로운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성공적인 기준 적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투명하고 합리적인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 항공학적 검토 기준을 구체화하고 지역별 적용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여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지자체, 주민, 항공업계 간의 충분한 논의를 통해 재산권 보호와 항공 안전의 균형점을 찾고, 지역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79년 만의 대규모 개정인 만큼, 정부는 항공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면서도 지역 주민들의 재산권과 도시 발전 요구를 균형 있게 수용하는 지혜로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앞으로 국토교통부의 항공학적 검토 결과와 각 지자체의 대응이 최종 기준 적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